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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분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데도 헤모글로빈 수치가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면, 문제는 철분의 양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병동 실습을 돌면서 저는 이 상황을 수도 없이 목격했고, 그 원인이 '헵시딘'이라는 호르몬에 있다는 것을 임상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철분제를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이유
간호학과 실습을 하다 보면, 만성 피로와 어지러움을 달고 사는 동기들을 정말 자주 보게 됩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고, 주변 동기들 역시 철분제를 습관처럼 챙겨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꾸준히 먹는데도 피검사 결과는 별 차이가 없고, 오히려 소화불량과 변비로 더 힘들어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까요.
철분이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Hemoglobin)에 포함된 철분이 산소와 결합해 온몸으로 산소를 실어 나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헤모글로빈이란 적혈구 안에 있는 단백질로, 폐에서 받아들인 산소를 각 세포에 전달하는 운반체 역할을 합니다. 철분이 부족해지면 이 운반 기능이 떨어져 세포 수준에서부터 에너지 생산이 원활하지 않게 됩니다.
임상에서 환자들의 케이스를 분석하며 알게 된 것은, 체내 철분 저장량을 나타내는 페리틴(Ferritin) 수치가 정상이거나 오히려 높은 상태에서도 CRP(C-반응성 단백질) 수치가 함께 높으면 빈혈 증상이 나타난다는 점이었습니다. 페리틴이란 간과 골수에서 철분을 안전하게 묶어두는 저장 단백질로, 이 수치가 낮으면 철분 결핍, 높으면 철분 과잉 혹은 염증 상태로 해석합니다. 저장된 철분이 있어도 정작 조혈에 쓰이지 못하는 상황, 그 배후에는 반드시 헵시딘이 있었습니다.
- 창백한 안색, 손발 저림, 수족냉증은 혈액 부족의 대표적 신호입니다
- 기억력 저하, 심장 두근거림, 피부 건조와 염증도 만성 빈혈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 손톱이 세로로 갈라지거나 숟가락처럼 파이는 현상도 철분 결핍을 의심할 수 있는 단서입니다
헵시딘이 철분 흡수를 막는 원리
헵시딘(Hepcidin)은 간에서 분비되는 펩타이드 호르몬입니다. 쉽게 말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철분의 양을 조절하는 '철분 게이트키퍼' 역할을 합니다. 평상시에는 철분이 갑자기 과잉 유입될 때 독소로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적절히 분비됩니다. 이 자체는 매우 정교한 방어 기전입니다.
문제는 만성 염증이나 지속적인 스트레스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이때 체내에서 인터루킨-6(IL-6)이라는 전염증성 사이토카인이 분비됩니다. 여기서 IL-6이란 면역 반응 과정에서 염증을 촉진하는 신호 물질로, 헵시딘 유전자 발현을 직접 자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NIH PubMed Central, Hepcidin and the iron-infection axis). IL-6가 지속적으로 높은 상태가 이어지면, 헵시딘 역시 만성적으로 과분비됩니다.
헵시딘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장관 세포막의 철 통로 단백질인 페로포틴(Ferroportin)과 결합해 이를 분해합니다. 페로포틴이란 장에서 흡수한 철분을 혈액 속으로 내보내는 운반체 역할을 하는 단백질입니다. 이것이 막히면 아무리 철분을 입으로 넣어줘도 혈액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장관에서 걸러져 버립니다. 이 상태가 바로 '염증성 빈혈(Anemia of Inflammation)'이며, 제가 병동에서 만난 만성 질환 환자분들 상당수가 이 패턴에 해당했습니다.
밤샘 과제와 실습 스트레스, 불규칙한 수면이 반복되던 제 학교 생활을 돌이켜 보면, 그 자체가 헵시딘을 끌어올리는 환경이었습니다. 몸이 늘 만성 염증 상태에 놓여 있었던 셈이고, 철분을 아무리 보충해도 흡수되지 못하고 튕겨 나갔던 것입니다. 솔직히 이건 저도 공부하기 전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혈액 건강을 되살리는 실전 접근법
철분 흡수율을 높이려면 먼저 먹는 철분의 종류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물성 식품에 들어 있는 비헴철(Non-heme iron)은 흡수율이 2~10%에 불과하지만, 소고기·조개류·동물의 간처럼 동물성 식품에 포함된 헴철(Heme iron)은 15~35%까지 올라갑니다. 헴철은 동물이 이미 대사 과정을 거쳐 변환해 놓은 형태라 우리 몸이 별다른 변환 과정 없이 바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간요리나 피조개 무침, 바지락 된장국을 꾸준히 식단에 넣었을 때 체감상 피로도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는데, 이것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음을 나중에 확인하게 됐습니다.
비헴철을 섭취할 때는 비타민 C를 함께 먹는 것이 흡수율을 높이는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시금치나 목이버섯에 레몬즙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앞서 말한 헵시딘 문제를 동시에 건드려야 합니다.
헵시딘 수치를 낮추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 대단한 보충제가 아니라 수면, 스트레스 관리, 규칙적인 신체 활동입니다. 코르티솔(Cortisol), 즉 스트레스 호르몬이 만성적으로 높게 유지되면 전신 염증 반응을 촉진해 헵시딘 분비를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WHO, Anaemia Fact Sheet에서도 빈혈의 복합적 원인 중 하나로 전신 염증 상태를 명시하고 있으며, 단순 영양 보충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한방에서 오래전부터 보혈 처방에 세트로 사용해 온 당귀(當歸)와 숙지황(熟地黃)도 주목할 만합니다. 당귀는 간에서 페리틴 단백질 생성을 촉진해 철분 저장을 돕고, 숙지황의 카탈폴(Catalpol) 성분은 조혈 세포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으로 연구되어 있습니다. 카탈폴이란 숙지황에서 추출되는 이리도이드 배당체 성분으로, 골수 내 조혈모세포 증식을 자극해 적혈구 생성을 촉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수천 년간 경험적으로 쌓아온 조합이 현대 연구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 헴철 공급원: 소간, 아귀간, 피조개, 꼬막, 굴, 바지락, 선지
- 헵시딘 억제에 도움이 되는 식품: 검은콩, 검은깨, 목이버섯, 비타민 C 풍부한 채소·과일
- 생활 습관: 하루 7시간 이상 수면 확보, 유산소 운동 주 3회 이상, 스트레스 완충 루틴 만들기
- 한방 보조: 당귀·숙지황 조합 (전문가 상담 후 활용 권장)
철분제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상 현장에서 수많은 케이스를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철분을 보충하는 것과 철분이 실제로 몸에 쌓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내 몸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수면은 충분한지, 만성 염증의 씨앗이 되는 스트레스는 관리되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 혈액 건강의 진짜 출발점입니다.
만약 철분제를 먹어도 차도가 없거나, 늘 피곤하고 손발이 차다면 헵시딘 과분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CRP와 페리틴 수치를 함께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전문의와 상담해 현재 내 몸의 염증 상태를 먼저 파악하는 것, 그것이 지름길입니다.